고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20여일이 됩니다.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며칠을 노심초사 기도했으나
끝내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불과 나흘 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늘 분주하게 사시더니
종종걸음으로 가셨습니다.
89년 인생
불꽃처럼 사시더니 불꽃처럼 가셨고
바람처럼 사시더니 바람처럼 가셨습니다.
코로나 4단계로 인하여
장례절차에 많은 제한이 있어
가족이며 목사인 위치로 해서
입관예식과 봉안예식을 맡았습니다.
사랑 많이 받은 조카로서
마지막 사랑을 드리는 심정으로
정성껏 천국으로 환송해 드렸습니다.
고모님은 잘 아시다시피
한국현대무용의 개척자로
한국무용사의 한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1950년대 비교적 점잖고 보수적인 전주,
그것도 아주 엄격했던 기독교 가정에서
무용의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며
가슴 속 꿈과 열정을 따라 사셨습니다.
저에겐 자상한 고모셨습니다.
어릴 적 집에 오시면
저더러 꼭 춤을 추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춤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춤을 추고 나니
뭘 갖고 싶냐고 물으셨습니다.
‘농구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후 진짜로 농구공을 사오셨습니다.
그 당시(1960년대)는 그렇게 선물을
받는 일이 흔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정말 폴짝 폴짝 뛰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뒤로도 늘 자상한 사랑의 손길로 인해
늘 감사하고 빚진 마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 연구차 나가 있던
동생이 7월 초에 한국에 들어왔고
마침 종원이도 한국에 들어와 있어서
마지막 시간을 모두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슬픔 가운데도 감사했습니다.
장례 내내 문세가 참 든든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의 사위가 되어
좋을 땐 함께 기뻐하고
힘들 땐 든든히 바람막이가 되어 준
시간들이 고맙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가셔서
장례가 끝나고 아쉬움과 허전함.
죄송한 마음이 복잡하게 밀려왔습니다.
가까이 있던 자식들은 더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 역시 먼저 가신 분이 그랬듯이
내 뒤를 따라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야겠기에
우리의 길을 성실히 가고자 합니다.
위로해 주신 마음들에 감사합니다.
에덴 낙원 봉안식장까지
와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